경희일리한의원

칼럼/오해와 진실

오해와 진실

한의학이 비과학이라는 착각은 어디서 오는가

경희일리한의원2026.09.03

들어가며

"이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예요?" 진료 중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면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학적이다"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왜 효과가 있는지 분자 수준까지 완전히 밝혀졌다는 뜻으로 쓰십니다. 하지만 의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정의는 틀렸습니다. 의학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효과를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검증했다는 뜻이지, 기전을 100퍼센트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보면, 한약만큼 방대한 관찰 데이터를 가진 치료 영역은 흔치 않습니다.

데이터의 규모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이라는 방법론은 20세기 중반에야 정립되었습니다. 반면 한약 처방은 수천 년에 걸쳐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무수히 많은 환자에게 시행되어 왔습니다. 어떤 처방이 어떤 증상에 듣고, 어떤 조합에서 부작용이 나타나는지가 세대를 거듭하며 기록되고 수정되어 온 것입니다. 규모만 놓고 보면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기간에 걸친, 가장 많은 인구를 대상으로 한 관찰 데이터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것이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과 같은 수준의 근거는 아닙니다. 대조군도 없었고, 체계적인 기록 방식도 지금 기준으로는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근거가 없다는 말과 근거의 형태가 다르다는 말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후대로 전승된 임상 경험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검증 과정을 거쳐온 데이터입니다.

세대를 거치며 걸러진 처방들

이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하나의 처방이 수백 년 이상 여러 의서에 반복적으로 기록되고 임상에서 계속 쓰였다는 것은, 그 처방이 최소한 뚜렷한 해가 없었고 어느 정도 효과가 관찰되었다는 뜻입니다.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심각한 처방은 자연히 후대 의서에서 빠지거나 용법이 수정되었습니다.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 같은 문헌들은 결국 이런 다세대에 걸친 관찰과 도태의 결과물을 정리해 둔 기록입니다.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이 수십 명에서 수천 명 단위의 참가자를 몇 년간 관찰한다면, 이 전통적 축적은 수천 년, 수억 명 단위의 시행착오가 걸러진 결과라는 점에서 결이 다른 근거입니다.

현대 과학이 이 축적을 검증하는 방식

이 오래된 관찰 데이터가 실제로 유효했는지는, 현대 화학과 약리학이 하나씩 확인해 왔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개똥쑥, 한의학에서 청호라 부르는 약재입니다. 중국의 한 연구팀은 4세기에 쓰인 한의학 문헌에서 학질, 즉 말라리아 치료에 청호를 쓴 기록을 참고해 1970년대에 이 약재에서 아르테미시닌이라는 성분을 분리해냈습니다. 이 성분은 이후 전 세계 말라리아 치료의 핵심 약물이 되었고, 이 발견을 이끈 연구자는 201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수천 년 전 기록된 임상 경험이, 현대 과학의 정제 과정을 거쳐 실제 신약으로 이어진 사례입니다.

마황도 비슷합니다. 한의학에서 오랫동안 발한과 천식 치료에 써 온 이 약재에서, 19세기 말 일본 화학자가 에페드린이라는 성분을 분리했습니다. 이 성분은 이후 기관지 확장제와 코감기약의 기초 성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수천 년간 축적된 임상 경험이 먼저 있었고 현대 과학은 그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성분을 찾아내고 정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한약재가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전통적으로 쓰여온 모든 약재와 처방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랜 기간 쓰였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적 안전성 기준을 자동으로 통과했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방금 말씀드린 마황만 해도, 유효 성분인 에페드린이 심혈관계와 자율신경계에 작용하는 만큼 심혈관 질환이나 특정 기저질환이 있는 환자에게는 반드시 사전 검토가 필요한 약재입니다. 저희가 처방 전 환자분의 병력을 꼼꼼히 확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래 쓰여온 약재일수록 그만큼 축적된 임상 경험도 많지만, 동시에 현대적 기준으로 다시 한번 짚어야 할 지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오해가 남아있는 이유

이렇게 근거가 쌓여 있는데도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데는 몇 가지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보도의 비대칭성입니다. 개별 부작용 사례나 사고는 뉴스 가치가 높아 집중적으로 보도되는 반면, 매일 이루어지는 안전한 진료나 꾸준히 발표되는 근거 연구는 상대적으로 보도되지 않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악의라기보다, 사건 중심으로 작동하는 보도 방식 자체의 속성에 가깝습니다.

둘째는 제도적 경쟁 구도입니다. 보험 수가나 의료기기 사용 범위, 진단 검사 허용 범위 등을 둘러싸고 한의학과 양방 사이에 실제로 이해관계가 갈리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한의학은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단순화되어 굳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는 정보의 시차입니다. 한의학의 근거가 메타분석과 체계적 문헌고찰 수준까지 쌓인 것은 대부분 지난 10~20년 사이의 일입니다. 반면 한의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형성된 경우가 많아, 최신 연구 결과가 인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 세 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끈질기게 남아있는지 설명이 되면서도, 그 말 자체가 근거에 기반한 결론은 아니라는 것도 함께 보이실 겁니다.

진료에서 저희가 하는 것

그래서 저희가 택한 방향은 전통의 축적과 현대의 검증을 함께 쓰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임상에서 효과가 반복적으로 관찰되어 온 처방을 기본으로 삼되, 환자분의 현재 건강 상태와 병력을 근거로 안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객관적 검사를 통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뒤 개인별로 조정합니다. 오래된 경험을 무조건 신뢰하지도,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가볍게 보지도 않는 것이 저희가 생각하는 균형입니다.

마치며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대조군을 둔 임상시험만이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좁은 정의에서 출발한 오해에 가깝습니다. 정작 한약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시간에 걸쳐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시행된 임상 경험의 축적물이고, 그 안에서 실제로 유효했던 성분들이 현대 과학을 통해 하나씩 확인되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오래된 데이터를 무조건 믿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정직하게 검증하며 쓰는 일입니다. 궁금하신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진료 중에 편하게 여쭤봐 주세요.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그 처방을 권해드리는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본 콘텐츠는 일반적인 건강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인의 증상에 대한 진단이나 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진단은 방문 진료를 통해 확인해 주세요.
#한의학#아르테미시닌#전통의학#오해와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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