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의학 이야기
병이 되기 전에 돌보는 의학, 치미병(治未病)
진료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검진 받았는데 다 정상이래요. 근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요."
수치는 멀쩡한데 몸은 예전 같지 않다는 분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고, 밥을 먹으면 한참 더부룩하고, 푹 잤다 싶은데도 개운하지가 않다고 하십니다. 병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괜찮다고 넘기기엔 분명 불편한 상태이지요.
한의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미병(未病)'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병이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몸을 돌보는 일을 '치미병(治未病)'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합니다.
좋은 의사는 병이 되기 전에 본다
『황제내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성인은 이미 병든 것을 고치지 않고, 아직 병들지 않은 것을 다스린다. 병이 다 생긴 뒤에 약을 쓰는 건 목마른 뒤에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당나라 때 의사 손사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사를 세 부류로 나눴습니다. 병이 되기 전에 다스리는 의사, 병이 되려 할 때 다스리는 의사, 병이 된 뒤에야 다스리는 의사. 그중 첫 번째를 가장 높이 쳤습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옛 성현의 이상적인 말씀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진료를 하면 할수록 이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요즘 병은 천천히 온다
예전에는 전염병처럼 원인이 분명하고 빠르게 진행하는 병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고혈압, 당뇨, 심혈관질환 같은 만성질환이 건강을 위협하는 주된 원인이 됐고, 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 사망의 4분의 3 가까이가 이런 만성질환과 관련 있다고 봅니다.
만성질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늦게 자는 습관, 불규칙한 식사,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쌓이다가 어느 순간 진단명을 얻게 되지요. 현대의학이 '전당뇨'나 '고혈압 전단계' 같은 이름을 붙여 관리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희망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병이 만들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건, 그 사이에 돌이킬 기회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니까요.
병을 막는 것만이 아니다
치미병을 흔히 '예방'으로 번역하지만, 한의학에서는 그보다 넓게 봅니다. 병이 생기기 전에 막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생긴 병이 더 깊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나은 뒤에 다시 도지지 않게 하는 것까지 모두 치미병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소화불량이 잠을 설치게 하고, 잠이 부족하니 낮에 피곤하고 머리가 아파지는 식으로 증상이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고리를 중간에 끊어주는 것도 치미병입니다. 증상이 가라앉은 뒤에도 그 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몸의 바탕을 살피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결국 치미병은 어떤 특별한 치료법이라기보다, 건강을 '아프다, 안 아프다' 둘로 가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태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검사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건강검진은 정말 중요합니다. 큰 병을 일찍 찾아내는 데 이만한 도구가 없습니다. 다만 검사는 기본적으로 '이상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려내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기준선을 넘기 전의 불편함은 대개 정상으로 분류됩니다.
한의학은 이 부분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맥을 짚고, 혀를 보고, 얼굴빛을 살피고, 소화와 대변, 잠, 땀, 추위를 타는지 더위를 타는지, 요즘 마음은 어떤지를 묻습니다. 따로 노는 것 같은 증상들을 하나로 엮어 지금 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를 읽어내는 과정인데, 이를 변증(辨證)이라고 합니다.
같은 피로라도 사람마다 이유가 다릅니다. 기운 자체가 모자란 분도 있고, 몸속에 순환되지 못한 것이 정체되어 무거운 분도 있고, 긴장이 풀리지 않아 지치는 분도 있습니다. 이유가 다르면 돌보는 방법도 달라야 하지요.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도 이런 미병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이면, 한의학의 진찰이 검사를 대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검사가 "큰 병은 없습니다"라고 말해줄 때, 그렇다면 지금 이 몸은 어떤 상태인지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눈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결국은 생활이다
치미병의 가장 기본은 사실 약보다 생활입니다. 『황제내경』은 계절마다 사는 법을 따로 일러둡니다. 봄에는 일찍 일어나 몸을 펴고, 여름에는 움직이되 지나치지 않게 하고, 가을에는 마음을 거두고, 겨울에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라고요.
재미있는 건 이 이야기가 요즘 생체리듬 연구와 꽤 잘 맞는다는 점입니다. 아침 햇빛을 쬐고, 밥을 비슷한 시간에 먹고, 밤늦게 먹거나 밝은 화면을 오래 보지 않는 것이 잠과 대사 건강에 좋다는 연구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표현은 달라도 '때에 맞춰 살라'는 말을 다시 하고 있는 셈이지요.
거창한 건 필요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일정하게 맞추는 것, 속이 편할 만큼만 천천히 먹는 것, 하루 한 번은 밖에 나가 걷는 것. 여기에 마음에 쌓인 것을 너무 오래 묵혀두지 않는 것 정도면 충분한 시작입니다. 한의학은 오래 눌러둔 감정이 몸의 흐름을 막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신호가 몇 주씩 이어진다면
충분히 자도 개운하지 않고 오후만 되면 기운이 빠진다거나,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늘 더부룩하다거나, 손발이 유난히 차갑거나 반대로 얼굴로 열이 자주 오른다거나, 별일 아닌데도 예민해지고 긴장이 잘 안 풀린다거나, 이유 없이 피부 트러블이나 두드러기가 반복된다면 몸이 균형을 되찾을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유 없이 체중이 빠지거나, 가슴이 아프거나, 변에 피가 섞이거나, 열이 계속된다면 먼저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치미병은 검사를 미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검사와 함께 가는 돌봄입니다.
마치며
병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몸은 꽤 오래전부터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2천 년 전 한의학이 가장 훌륭한 의술이라 불렀던 건 결국 그것이었습니다.
"아직 병은 아닌데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신다면, 너무 걱정하기보다는 몸을 한번 돌볼 때가 됐구나 하고 받아들이셨으면 합니다. 병이 된 다음에 고치는 것보다, 그 전에 돌보는 편이 훨씬 가볍습니다.
비슷한 증상이 궁금하신가요?
카카오톡 또는 전화로 문의해 주시면 자세히 상담해 드립니다.